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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단 하루도 꺼진 적 없던 포항제철소의 불이 2022년 9월, 사흘째 꺼져 있었습니다. 뉴스에서 피해 규모를 숫자로만 접했던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 사흘이 얼마나 처절한 시간이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고로 휴풍, 누가 먼저 멈출 결심을 했는가
태풍 흰남노가 포항에 상륙한 건 2022년 9월이었습니다. 문제는 태풍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태풍이 빠져나간 뒤 냉천 상류의 저수지에서 쏟아진 물이 하류 쪽으로 집중되면서, 제철소 담장을 무너뜨리고 공장 안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영화 <데드라인>은 바로 그 몇 시간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 이재학 대표가 내린 첫 번째 결정은 고로 휴풍이었습니다. 여기서 고로(高爐)란 철광석과 석탄을 고온에서 녹여 쇳물을 생산하는 용광로를 말합니다. 365일 24시간 꺼지지 않는 구조로 운영되는데, 아래에서 뜨거운 바람을 불어 넣어 원료를 녹이는 방식입니다. 휴풍(休風)은 그 바람, 즉 송풍을 일시 중단하는 조치입니다. 쉽게 말해 고로의 숨통을 잠시 틀어막는 것인데, 이 상태가 7일을 넘기면 고로는 내부에서 굳어버려 사실상 폐기해야 합니다. 하나를 다시 짓는 데 약 5,000억 원이 들고, 그 사이 생산 차질로 매일 수십억 원의 손실이 발생합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가장 놀랐던 건 다섯 개 고로를 동시에 세우는 결정이었습니다. 하나도 아니고, 전부였습니다. 왜냐하면 펄펄 끓는 쇳물과 빗물이 만나면 대형 폭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쇳물 위로 차가운 물이 닿는 순간 수증기 폭발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공장 전체를 날릴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고로를 멈추는 것은 손실을 감수하는 결정이기도 했지만, 대형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마지막 삼고로였습니다. 휴풍을 진행하는 도중 공장 안으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전력까지 끊겨버렸습니다. 정전 상태에서 고로 안에 쇳물이 남아 있으면 쇳물이 순식간에 응고되거나 고로 자체가 폭발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일을 하다가 예상 못한 상황이 터지면 일단 멈추고 누군가 지시해 주길 기다렸던 적이 있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그게 얼마나 무책임한 태도였는지 새삼 느꼈습니다. 현장 직원들은 물이 허리까지 차오른 상황에서도 각자 맡은 공정을 끝까지 확인하러 움직였으니까요.
- 고로(高爐): 철광석과 석탄을 고온에서 녹여 쇳물을 만드는 용광로. 365일 무중단 운영이 원칙
- 휴풍(休風): 고로 하부에서 불어 넣는 송풍을 중단하는 조치. 7일을 초과하면 고로 폐기 수순
- 수증기 폭발: 쇳물과 물이 접촉할 때 발생하는 폭발. 공장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규모
- 재강 공장: 고로에서 쏟아진 쇳물을 처음 받아내는 시설. 침수 시 전체 공정 마비
수력도약, 그날의 물을 막을 수 있었을까
영화에서 PD 유나가 끝까지 파고든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태풍을 왜 못 막았느냐"는 것이었죠. 강과장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습니다. "우리는 태풍을 못 막은 게 아닙니다." 처음엔 변명처럼 들렸는데, 취재가 이어질수록 그 말의 뜻이 달라졌습니다.
공대 출신이었던 유나가 실제 측정값을 입력해 만든 시뮬레이션은 그날 물의 이동 경로를 정확히 재현해 냈습니다. 냉천 상류에서 태풍이 지나간 뒤 딱 4시간 동안 350mm가 넘는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는 500년 강수 기록을 가볍게 넘어선 수치였습니다. 이 물이 온갖 잡동사니를 끌고 내려오면서 냉천 하류를 막아버렸고, 하류가 상류보다 좁은 지형적 특성 때문에 물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력도약(Hydraulic Jump)입니다. 수력도약이란 빠르게 흐르던 물이 좁은 구간을 지나면서 속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거대한 파고를 형성하는 유체역학 현상입니다. 현장 사람들이 "쓰나미 같았다"고 한 표현이 과장이 아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뮬레이션 결과상 축구장 350개를 1m 높이로 채울 수 있는 물이 제철소 방향으로 쏟아졌습니다. 물리적으로 막을 수 없는 양이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저도 예상 밖이었습니다. 대기업 제철소가 태풍 대비를 제대로 못 했을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실제로는 태풍 자체에 대한 준비는 충분했고 문제는 태풍 이후 유례없는 집중호우였습니다. 출처: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2022년 태풍 흰남노는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중 역대 최강 수준의 최대 풍속을 기록했으며, 포항 지역은 태풍 후 기록적 강수가 집중되었습니다.
긴급 상황은 공장 침수와 정전만이 아니었습니다. 전력이 끊기면서 산소 탱크와 질소 탱크의 자동 밸브가 작동 불능 상태가 됐습니다. 액화산소 탱크가 폭발하면 공장 절반이 날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 수동으로 64m 높이의 플랜트 꼭대기까지 올라가 밸브를 개방해야 했습니다. SNS에서 화재로 오해받았던 그 불빛은 사실 폭발을 막기 위해 탱크 안의 가스를 태워 배출하는 안전 조치였습니다. 출처: POSCO 공식 사이트에서도 당시 사고 이후 복구 과정과 대응 경과를 공개한 바 있습니다.
고로 복구 과정에서도 아이디어 하나가 판세를 바꿨습니다. 재강 공장이 침수돼 쇳물을 받아낼 곳이 없는 상황에서, 이재학 대표가 제안한 것은 사처리장, 즉 모래 욕조였습니다. 쇳물을 모래 위에 직접 쏟아내는 매우 오래된 방식인데, 정작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어 경험자를 직접 섭외해야 했습니다. 25톤짜리 모래 차량 170대 분량을 발로 뛰어 구한 것도 현장 직원들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상황에서 교과서에 없는 방법을 꺼내 드는 건 쉽지 않습니다.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포기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반응이거든요.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데드라인은 실화인가요?
A. 네, 2022년 9월 태풍 흰남노 상륙 당시 포항제철소(POSCO)에서 실제로 발생한 침수 사태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고로 휴풍 결정, 재강 공장 침수, 산소 탱크 밸브 수동 개방 등 주요 장면들은 실제 상황을 모티브로 재구성했습니다.
Q. 고로 휴풍을 하면 왜 그렇게 위험한가요?
A. 고로는 내부에 항상 수백 톤의 쇳물이 흐르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휴풍으로 송풍이 중단되면 내부 쇳물이 굳기 시작하고, 이 상태가 7일을 넘기면 고로를 폐기해야 합니다. 게다가 쇳물이 굳는 과정에서 폭발이 발생할 수도 있어, 휴풍 기간 관리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Q. SNS에서 화재라고 퍼진 불꽃은 뭐였나요?
A. 정전으로 자동 밸브가 작동하지 않게 된 산소·가스 탱크의 압력이 위험 수준에 달하자, 직원들이 수동으로 밸브를 열어 내부 가스를 태워 배출하는 플레어링(Flaring)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폭발을 막기 위한 안전 절차였으며, 화재가 아니었습니다.
Q. 수력도약이 포항제철소 침수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A. 수력도약(Hydraulic Jump)은 빠른 유속의 물이 좁은 구간을 통과하며 파고와 속도가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입니다. 냉천 하류가 상류보다 좁은 지형 때문에 물이 가속되면서 제철소 담장을 무너뜨렸습니다. 4시간 동안 350mm 이상의 강수가 집중된 상황에서 이 현상이 더해져, 어떤 방어 시설로도 막기 어려운 규모의 물이 밀려든 것입니다.
Q. 당시 포항제철소에서 인명 피해는 없었나요?
A. 영화 기준으로는 사망자·실종자 없이 고립 직원 전원 구조로 마무리됩니다. 실제 사고에서도 제철소 측의 선제적 휴풍 결정과 신속한 대피 지시 덕분에 대형 인명 피해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시설 피해는 수천억 원 규모에 달했습니다.
결론
영화 <데드라인>을 보고 나서 제가 바꾼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재난 뉴스를 볼 때 더 이상 피해 금액만 보지 않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 숫자 뒤에는 물이 무릎까지 차오른 공장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킨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영화가 다소 기업 홍보 성격으로 느껴지는 장면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 그리고 기술보다 사람의 판단과 책임감이 먼저였다는 메시지만큼은 진심으로 와닿았습니다. 제 경험상 위기 상황에서 "이게 내 일인가"를 따지기 시작하면 이미 늦습니다. 이 영화가 마음에 걸린다면, 2022년 포항 침수 사태 관련 실제 보도 자료도 함께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영화보다 더 생생한 디테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