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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부장판사가 직접 극본을 쓴 법정 드라마가 있습니다. 2018년 방영된 JTBC 〈미스 함무라비〉는 법원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되, 승패보다 사람을 먼저 들여다보는 드라마입니다. 솔직히 처음엔 가볍게 틀었는데, 보면 볼수록 단순한 법정물이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정의감이 넘치는 신임 판사와 원칙주의 엘리트 판사가 부딪히면서 '옳다는 것'의 의미를 계속 다시 묻는 구조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공감과 원칙, 어느 쪽이 진짜 정의인가
〈미스 함무라비〉의 핵심 갈등은 두 신임 판사의 충돌에서 출발합니다. 박차오름(고아라 분)은 피아노과 출신이라는 이색적인 이력을 가진 판사로, 법정에서 당사자의 감정과 사정에 깊이 공감합니다. 반면 임바른(김명수 분)은 사법연수원 수석 출신의 엘리트로, 증거와 법리 중심의 냉정한 판단을 고수합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박차오름의 첫 재판 장면이었습니다. 그녀는 원고 할머니의 사정에 마음이 쓰여 자기 부서 사건이 아닌 다른 재판부 기록까지 들여다봅니다.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할머니가 상대방에게 전화해서 "내 먼 친척이 판사야"라는 말로 상대를 압박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한쪽 말만 믿은 탓에 잘못된 판단을 내릴 뻔한 것이죠.
여기서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이 선명해집니다. 선한 의도가 항상 선한 결과를 만드는가. 제 경험상 이건 드라마 안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일상에서도 "나는 좋은 뜻으로 한 건데"가 오히려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경우를 적잖이 봤습니다.
임바른의 태도도 단순히 차갑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오름이 야근을 반복하자 자신이 밤새 상속 지분 계산을 끝내 놓고, 오름에게는 "30분이면 된다"며 먼저 귀가시킵니다. 냉정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조용하게 배려를 실천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을 다루는 에피소드에서는 피해자가 느끼는 공포감, 즉 '합리적 피해자 기준(reasonable victim standard)'이라는 법적 개념이 등장합니다. 합리적 피해자 기준이란 피해자 개인의 감수성이 아니라, 같은 상황에 놓인 평균적인 사람이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을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법리입니다. 드라마는 이 개념을 설명하는 대신 실무관 이도현이 직접 정판사의 개인 공간을 침범해 불쾌감을 체험하게 하는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그 장면 하나가 긴 설명보다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 박차오름: 공감 우선, 사람의 사정에 먼저 반응하는 이상주의형 판사
- 임바른: 증거와 법리 중심, 감정보다 원칙을 앞세우는 현실주의형 판사
- 한세상 부장판사: 20년 경력, 지방대 출신으로 학벌보다 재판을 중시하는 독립적 인물
- 성공충 부장판사: 조정률 실적을 위해 배석 판사를 혹사시키는 출세 지향형 인물
조직문화와 집단행동, 법원 안의 또 다른 재판
〈미스 함무라비〉가 일반적인 법정 드라마와 달리 기억에 남는 이유는 사건 해결보다 조직 내부의 권력 구조를 더 집요하게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임신 중인 홍은희 판사가 성공충 부장판사의 지시로 밤샘 근무와 끝없는 판결문 수정을 반복하다 결국 유산에 이르는 과정은 보기가 상당히 불편했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솔직히 드라마가 좀 과장한 건 아닌가 싶었는데, 실제 법원 조직 내 배석 판사의 근무 환경에 대한 기사들을 찾아보니 그렇지만도 않더군요.
박차오름은 성공충을 징계해달라며 서명을 받으러 다닙니다. 그런데 한세상 부장판사는 그녀를 막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직업이 뭐야? 판사 아니야? 양측 얘기를 다 듣고 판단하는 판사. 문제 제기하기 전에 부장한테 얘기 한번 해봤냐고." 오름은 그제야 자신이 행동의 순서를 잘못 정했다는 걸 인정합니다. 정의롭고 싶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정작 판사로서의 원칙을 스스로 어긴 셈이죠.
이 지점이 제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입니다. 오름의 행동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 결과를 결정짓는다는 것, 그리고 조직 안에서 살아남아야 조직을 바꿀 수 있다는 현실적인 조언이 설득력 있게 전달됩니다.
전체 판사 회의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판사회의(judges' conference)란 법원 조직법상 판사 3분의 1 이상이 요구할 경우 법원장이 소집해야 하는 공식 회의체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전체 판사 과반수 출석이라는 조건을 채우기 위해 오름이 법원 복도에서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안내문을 돌립니다. 참석자 숫자가 20명 부족한 상황에서 오름이 마이크를 잡고 한 연설, 특히 "20년 넘게 재판을 하시면서도 사건 하나하나를 한 명의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부장님이 좋습니다"라는 대목은 개인적으로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현직 부장판사인 문유석이 쓴 동명 소설이고, 극본도 그가 직접 맡았습니다(출처: JTBC 공식 사이트). 현직 법관이 법원 조직의 내부 모습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은 국내에서 사실상 전례가 없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법원 안의 조직 문화, 배석 판사와 부장 판사의 위계, 조정률 같은 실적 압박이 의외로 현실감 있게 그려집니다. 법학계에서도 이 드라마를 법정 드라마의 새로운 기준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을 정도입니다(참고: 국가법령정보센터 — 법원조직법 관련 조문).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일부 에피소드는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너무 정면으로 나옵니다. 직장 내 성희롱, 여성 판사 차별, 조직 내 권력 남용 같은 주제가 연달아 등장하다 보면, 중반 이후부터는 조금 교훈적인 무게감이 쌓입니다. 제 경우엔 이 부분이 다소 피로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각각의 사건이 단순히 선악 구도로 끝나지 않고, 모든 당사자에게 나름의 사정이 있다는 걸 꼼꼼하게 짚어준다는 점에서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미스 함무라비, 법을 모르면 재미없나요?
A.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법률 개념들은 대부분 사건 안에서 자연스럽게 설명됩니다. 법정 용어보다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사정이 이야기의 중심이기 때문에, 법률 지식 없이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습니다.
Q. 박차오름이 피아노과 출신 판사라는 설정이 현실적인가요?
A. 실제로 예체능 전공 출신이 사법시험을 통해 법조인이 된 사례는 존재합니다. 다만 드라마에서 이 설정은 오름이 규범보다 사람의 감정에 먼저 반응하는 성격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합니다. 제가 느끼기엔 현실성보다 캐릭터의 색깔을 강조한 선택으로 보였습니다.
Q. 원작 소설과 드라마 중 어느 쪽을 먼저 보는 게 좋을까요?
A. 원작 소설은 법원 조직의 내밀한 묘사에 강점이 있고, 드라마는 인물 간의 감정선과 개별 사건의 극적 전개에 집중합니다. 드라마를 먼저 보고 소설로 넘어가면, 드라마에서 압축된 내용을 더 입체적으로 확인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Q. 성동일이 맡은 한세상 부장판사 캐릭터가 왜 인기 있나요?
A. 겉으로는 버럭하고 투박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일관되게 재판 본연의 가치를 지키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출세나 인맥보다 사건 자체에 집중하는 모습이, 조직 논리에 지친 시청자들에게 꽤 묵직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결론
〈미스 함무라비〉는 정의를 외치는 드라마가 아닙니다.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 왜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드라마입니다. 박차오름의 공감 능력과 임바른의 원칙 고수, 그 어느 쪽도 완전한 답이 아니라는 걸 두 사람이 함께 사건을 겪으면서 조금씩 알아가는 구조가 이 작품의 힘입니다.
법정 드라마가 낯설게 느껴지거나, 직장 내 권력 구조나 조직문화에 관심 있는 분께 특히 권하고 싶습니다. 제 경험상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에피소드 단위로 쉽게 끊기 어렵습니다. 전체 16부작이니, 주말에 몰아보는 방식도 나쁘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