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 무기가 된다면, 그 무기를 막을 수 있는 건 무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영화 을 처음 접했을 때 제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비무장지대(DMZ)에서 수색대원들이 의문의 공격으로 사망했다는 설정만 보면 흔한 군사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막상 보고 나면 이야기의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지한, 김민준 주연의 이 작품이 어떤 면에서 신선하고, 어떤 면에서 아쉬운지 제가 직접 본 시각으로 정리해봤습니다. 생체실험이라는 설정이 이 영화를 바꿔놓은 방식영화 초반, 관객이 받는 정보는 의도적으로 제한됩니다. 비무장지대 603 섹터에서 수색대원들이 집단으로 사망했고, 사체 상태가 일반적인 교전 피해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 저는 이 지점에서 이미 방향이 달라진다는 걸 느꼈습니다. 단순히 북한군..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로맨스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고층 빌딩, 외벽 청소 로프공, 두 남녀의 만남.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이건 로맨스보다 훨씬 무거운 이야기였습니다. 계약직 디자이너 서영이 직장과 가족, 사랑에서 조금씩 무너져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화면이 아니라 내 주변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이 든 감정은 답답함이었는데, 그 답답함이 단순히 불편한 게 아니라 현실과 너무 닮아 있어서 생기는 종류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고용불안이 몸으로 터지는 방식 — 이명과 어지럼증의 의미영화 《버티고》에서 주인공 서영은 계속해서 이명(耳鳴)과 어지럼증에 시달립니다. 이명이란 외부 소리 자극 없이 귀나 머릿속에서 소리가 들리는 증상으로, 지속될 ..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경찰 범죄 영화라고 해서 총격전이나 격투 장면을 기대했는데, 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과 '기억하는 것'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내세웁니다. 저도 처음엔 액션 없이 이게 얼마나 긴장감을 줄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보고 나서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주의력 편향 —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인간의 본능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신입 요원 하윤주가 황반장을 미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하철에서 내린 시각, 이동 경로, 통화 시간까지 하나하나 정확하게 기억해 내는 장면을 보면서 저는 처음에 '이 사람은 그냥 기억력이 비정상적으로 좋은 거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황반장이 던진 한마디가 그 인상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바로 "주의력 편향(Inattentional Blindn..
영화 한 편이 끝난 뒤에도 두 시간 넘게 멍하니 앉아 있었던 적이 얼마 없습니다. 2022년 개봉한 가 바로 그랬습니다. 범죄 스릴러라고 소개되는 경우가 많지만, 제가 직접 보고 나서 느낀 건 그보다 훨씬 무거운 무언가였습니다.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지, 그 안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이 영화만큼 정직하게 담아낸 작품은 드뭅니다. 문정이라는 인물, 악인이 아니라 벼랑 끝 인간일반적으로 범죄 영화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의 문정은 그 공식과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출발합니다. 그녀는 비닐하우스를 거처 삼아 살아가면서도 소년원에 있는 아들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요양보호사 일을 이어가는 인물입..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단순한 부부 멜로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기억을 잃은 아내, 곁에서 돌봐주는 남편이라는 설정이 워낙 익숙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중반을 넘어서면서 제가 완전히 잘못 읽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영화 는 기억상실을 단순한 장치로 쓰지 않고, 그 빈자리를 미스터리의 핵심으로 삼습니다. 추자현과 이무생의 연기가 그 구조를 조용히 떠받치고 있었고요. 기억상실이라는 장치가 이렇게 쓰일 줄 몰랐습니다영화에서 더키(추자현)는 교통사고 이후 역행성 기억상실(retrograde amnesia)을 겪습니다. 역행성 기억상실이란 사고 이전의 기억이 지워지는 증상으로, 단순히 "잊어버린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뇌의 해마와 편도체가 손상되거나 기능이 억제될 때 발생하며, 감정적으로 강..
막걸리를 화장품 공병에 담아 학교에 가져가는 열여덟 살 소녀로 시작해서, 누룩이 사라진 뒤 무너져 내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장동윤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인데요. 처음 보기 시작할 때는 솔직히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달라질 작품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 낙차가 꽤 강렬하게 남아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귀엽게 시작해서 등골이 서늘해지는 분위기 반전영화 초반은 솔직히 말하면 웃음이 나옵니다. 다 쓴 화장품 공병에 막걸리를 담아 책가방에 넣고 등교하는 다슬의 모습이 너무 당당해서요. 학교 화장실에서 몰래 홀짝이다가 친구한테 들키는 장면도 어딘가 코믹하게 느껴졌고, 양조장 아버지 밑에서 어릴 때부터 누룩을 만지며 자란 아이라는 설정도 '그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그런데 막걸리의 ..
1953년 전라남도 보성, 한 남자의 두 아내로 만난 두 여자가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로 남편의 재혼을 스스로 허락해야 했던 영순, 그리고 하나뿐인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후처(後妻)의 자리를 택한 경자.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먹먹함보다 불편함을 먼저 느꼈습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이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시대적 희생 — 개인의 행복을 지울 수밖에 없었던 구조한국 전쟁 직후인 1950년대는 가문의 대를 잇는 일이 개인의 감정보다 훨씬 큰 무게를 가지던 시대였습니다. 영화 속 영순이 시집을 온 지 6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본격적으로 재혼을 압박하는 장면은, 당시 여성에게 생식(生..
가족은 태어나면서 결정된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저도 오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을 보고 나서 그 확신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16살 소년과 서른 중반의 여성이 같은 지붕 아래 살면서 조금씩 가족의 모양을 만들어가는 이야기인데, 보는 내내 제가 직접 겪었던 관계들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혈연이 없어도 보호자가 될 수 있을까가족 관계를 혈연(blood relation), 즉 생물학적 연결로만 정의하는 시각이 아직도 강합니다. 여기서 혈연이란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처럼 유전자를 공유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진짜 가족은 혈연으로 이어진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가 섞였어도 서로 낯선 사람처럼 지내는 경우가 있는 반면,..
영화 속 정훈은 단 한 번도 "네가 원하는 게 뭐야?"라는 질문을 받지 못합니다. 이 사실 하나가 영화 전체를 관통합니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저도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습니다. 어딘가 익숙한 감각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립: 아무도 묻지 않는 아이의 속마음영화 은 IMF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를 흔들던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여기서 IMF 외환위기란 1997년 한국이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시작된 경제 붕괴 국면으로, 수많은 가정이 한순간에 생계를 잃고 가족 구조 자체가 흔들렸던 시기입니다. 그 혼란 속에서 소년 정훈이 겪는 고립은 단순히 외로움의 문제가 아닙니다.아버지 무진은 부동산 중개업을 하며 헐값에 나온 매물을 쓸어담는 시대의 흐름 속에 서 있습니다. 겉으로는 도시락을 손수 ..
7년 차 무명 개그맨이 드디어 자기 코너를 방송할 기회를 잡은 날, 프로그램이 폐지됩니다. 이 설정 하나로 영화 《컴백홈》은 시작됩니다. 처음엔 그냥 조폭 코미디겠거니 했는데, 제가 직접 보고 나서는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꿈과 생계 사이 — 7년 무명의 현실《컴백홈》의 주인공 이기세는 충청도 아산 출신으로, 개그맨을 꿈꾸며 서울로 상경한 인물입니다. 영화는 그가 무명 생활 7년 만에 겨우 코너 방영 기회를 얻는 장면부터 출발하는데, 하필 그 직전에 프로그램이 폐지되면서 모든 게 무너집니다. 집세도 못 내고, 친구 집에도 더 이상 얹혀살 수 없는 상황. 여기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까지 겹칩니다.솔직히 이 전개가 예상 밖이었습니다. "코미디 + 조폭"이라는 조합만 보고 가볍게 볼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무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