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람을 잃고 나서 한동안 일상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다가 사소한 장면 하나에 무너지는 그 감각. 2026년 6월 개봉 예정인 영화 아웃브레이크를 보다가 그 기억이 갑자기 올라왔습니다. 겉으로는 감염 재난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실이 한 사람을 어떻게 부수는지를 꽤 깊이 파고드는 작품입니다. 상실감이 현실을 어떻게 뒤트는가영화의 주인공 닐 모리스는 평범한 공원 경비원입니다. 하지만 아들 벤을 잃은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다른 궤도로 이탈합니다. 아내 에비는 벤이 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붙잡고 있고, 닐은 그런 에비 곁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버텨냅니다. 둘 다 살아 있지만, 둘 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태입니다.제가 가까운 사람과 관계가 멀어졌..
1953년 전라남도 보성, 한 남자의 두 아내로 만난 두 여자가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로 남편의 재혼을 스스로 허락해야 했던 영순, 그리고 하나뿐인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후처(後妻)의 자리를 택한 경자.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먹먹함보다 불편함을 먼저 느꼈습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이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시대적 희생 — 개인의 행복을 지울 수밖에 없었던 구조한국 전쟁 직후인 1950년대는 가문의 대를 잇는 일이 개인의 감정보다 훨씬 큰 무게를 가지던 시대였습니다. 영화 속 영순이 시집을 온 지 6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본격적으로 재혼을 압박하는 장면은, 당시 여성에게 생식(生..
영화 는 쇼트트랙 국가대표 출신 코치가 선수들에게 상습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실제와 닮은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어디서 끊어야 할지 몰라 화면을 계속 붙잡고 있었습니다. 보는 내내 불편하고 무거웠지만, 그 불편함이 결국 이 영화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였습니다. 피해자가 침묵할 수밖에 없는 구조, 영화가 보여준 현실혹시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피해자가 용기를 냈는데도 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걸까, 라고요. 영화 는 바로 그 물음을 정면으로 파고드는 작품입니다.영화의 주인공 주영은 전직 쇼트트랙 국가대표로, 현재는 학교에서 컬링부 코치로 일하고 있습니다. 과거 코치 차혁수에게 상습적인 폭행과 성폭행을 당했던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초반부터 강렬한 ..
50년간 단 하루도 꺼진 적 없던 포항제철소의 불이 2022년 9월, 사흘째 꺼져 있었습니다. 뉴스에서 피해 규모를 숫자로만 접했던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 사흘이 얼마나 처절한 시간이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고로 휴풍, 누가 먼저 멈출 결심을 했는가태풍 흰남노가 포항에 상륙한 건 2022년 9월이었습니다. 문제는 태풍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태풍이 빠져나간 뒤 냉천 상류의 저수지에서 쏟아진 물이 하류 쪽으로 집중되면서, 제철소 담장을 무너뜨리고 공장 안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영화 은 바로 그 몇 시간의 이야기입니다.영화에서 이재학 대표가 내린 첫 번째 결정은 고로 휴풍이었습니다. 여기서 고로(高爐)란 철광석과 석탄을 고온에서 녹여 쇳물을 생산하는 용광로를 말합니다. 365일 24시간 꺼지지 않는..
가족은 태어나면서 결정된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저도 오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을 보고 나서 그 확신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16살 소년과 서른 중반의 여성이 같은 지붕 아래 살면서 조금씩 가족의 모양을 만들어가는 이야기인데, 보는 내내 제가 직접 겪었던 관계들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혈연이 없어도 보호자가 될 수 있을까가족 관계를 혈연(blood relation), 즉 생물학적 연결로만 정의하는 시각이 아직도 강합니다. 여기서 혈연이란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처럼 유전자를 공유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진짜 가족은 혈연으로 이어진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가 섞였어도 서로 낯선 사람처럼 지내는 경우가 있는 반면,..
영화 속 정훈은 단 한 번도 "네가 원하는 게 뭐야?"라는 질문을 받지 못합니다. 이 사실 하나가 영화 전체를 관통합니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저도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습니다. 어딘가 익숙한 감각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립: 아무도 묻지 않는 아이의 속마음영화 은 IMF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를 흔들던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여기서 IMF 외환위기란 1997년 한국이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시작된 경제 붕괴 국면으로, 수많은 가정이 한순간에 생계를 잃고 가족 구조 자체가 흔들렸던 시기입니다. 그 혼란 속에서 소년 정훈이 겪는 고립은 단순히 외로움의 문제가 아닙니다.아버지 무진은 부동산 중개업을 하며 헐값에 나온 매물을 쓸어담는 시대의 흐름 속에 서 있습니다. 겉으로는 도시락을 손수 ..
결혼 10년 차 부부가 정해진 날짜에만 잠자리를 갖는다는 설정, 처음 봤을 때 너무 리얼해서 잠깐 멈칫했습니다. 영화 는 불륜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쓰면서도 "왜 여기까지 왔는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품입니다. 단순한 불륜 드라마가 아니라 권태기 심리와 관계 동학(relationship dynamics)을 꽤 정밀하게 해부한다는 점에서, 보고 나서 생각이 꽤 오래 남았습니다. 권태기가 불륜으로 이어지는 심리 구조심리학에서는 장기 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 무뎌짐을 '친밀감 포화(intimacy saturation)'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친밀감 포화란, 상대방이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자극 자체가 사라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처음엔 설레던 행동이 점차 배경으로 녹아들고, 결국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존재가 ..
선의로 건넨 우산 하나가 한 교사의 직업과 결혼, 인간관계를 한꺼번에 무너뜨립니다. 영화 를 보고 나서 저는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믿거나 의심할 때 우리가 얼마나 쉽게 확인도 안 된 말을 사실처럼 받아들이는지, 그게 이렇게 무서운 일인지 새삼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평판 붕괴 — 작은 거짓말이 눈덩이가 되는 과정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평판 붕괴(reputation collapse)의 속도였습니다. 평판 붕괴란 한 번 형성된 부정적 이미지가 검증 없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당사자가 반박할 기회조차 잃는 현상을 말합니다. 수연은 아동학대를 했다는 의심을 받기 시작한 순간부터 자신의 모든 행동이 불리하게 해석됩니다. 아이에게 다가가면 입막음으로, 억울함을 강하게 주장하면 감정 조..
저도 처음엔 '쓰레기를 줍는 여자 이야기'라는 설정만 보고 그냥 넘겼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 꽤 오래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이 과연 그 사람이 남긴 흔적을 수집하는 일과 얼마나 다른가, 라는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영화 는 사랑 이야기를 겉에 두르고 있지만, 속으로는 신뢰와 정보 사이의 간극을 건드리는 작품입니다. 쓰레기로 사람을 읽는다는 것 — 설정의 팩트영화의 주인공 지수는 온라인 밀키트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입니다. 악성 CS(고객서비스) 전화도 유연하게 처리하고, 반품률을 낮추기 위해 이미지와 실제 제품의 괴리까지 꼼꼼히 따지는 소위 일잘러입니다. 그런 그녀가 퇴근 후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지수는 이웃이 버린 쓰레기를 집으로 가져와 장갑..
1947년, 미국 정부는 추락한 비행 접시를 회수했다고 발표했다가 단 24시간 만에 말을 뒤집었습니다. 이 한 줄의 사실이 수십 년간 이어진 UFO 음모론의 씨앗이 됐는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신작 《디스클로저 데이》는 바로 그 씨앗에서 출발합니다. 솔직히 처음 예고편을 접했을 때 저는 꽤 오랫동안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평소엔 UFO 이야기를 흥미로운 가십 정도로 흘려들었는데, 이번엔 뭔가 다른 감각이 왔습니다. 로즈웰 사건, 그 석연찮은 번복의 기록제가 처음 로즈웰 사건을 제대로 들여다본 건 몇 년 전 일이었습니다. 1947년 7월, 뉴멕시코주 로즈웰에서 당시 미 육군 항공대가 "비행 접시를 회수했다"는 공식 발표를 냈습니다. 그런데 불과 하루 만에 "기상 관측용 기구였다"며 입장을 번복했죠..
